문명을 등진 '영혼의 땅' 티베트에 가다

[문명을 등진 '영혼의 땅' 티베트에 가다·10]정신적 지도자 판첸라마와 시가체

추앙받는 '꼿꼿한 넋' 찰나에서 극락으로 인도 

   
▲ 역대 판첸라마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타쉬룬포사원의 영탑전.

[경인일보=글┃김종화기자]라싸(拉薩)에서 출발해 캄발라 고개를 힘겹게 넘어선 우리는 가옥 30여채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머물렀다. 라싸가 도심화돼가며 티베트 전통 양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교외의 작은 마을들은 아직도 현지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부터 쉽게 알 수 있었다. 취재팀이 들어선 음식점 한 편에는 티베트인의 정신적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칭송받고 있는 '판첸라마'의 사진과 불상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사진 앞에는 꽃이 놓여 있었다. 음식점을 찾은 손님에게 식당 주인은 물 외에 그들이 즐겨 마시는 수유차를 내놨다. 수유차는 야크에서 나오는 우유 또는 버터, 차와 약간의 소금을 넣어 만든다. 손님이 다 마시면 수유차를 계속 찻잔에 채워준다.

# 시가체(日喀則)로 가는 길

짜고 매운 맛이 강하며, 야채를 많이 사용해 만드는 한국 음식에 비해 티베트 음식은 기름지기때문에 한국 사람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양고기 구이의 경우 한국 사람들이 호기심에 맛을 보기는 하지만, 한끼 식사로 티베트 음식만 먹기에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 잠캉첸모(미륵전) 입구 바닥에 보석으로 치장된 만다라.

아침 식사후 우리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5천m가 넘는 캄발라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사막과 같은 평야를 달렸다. 멀리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손에 잡힐듯이 보였지만 1시간이 가고 2시간이 지나도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가끔 풀을 먹기 위해 이동하던 양들이 길을 막고 있어 쉬어가기도 했는데, 건조한 티베트 고원평야에서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티베트 전통 가옥과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로 순례길을 떠난 티베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길거리에서 쉬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외국 여행객들이 마냥 신기한 듯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시가체로 이동하며 재미있었던 것을 꼽으라면 교통규제 제도다. 한국에서는 고속도로나 한가한 교외의 도로에 과속 차량 단속용 카메라를 설치하지만, 이곳에는 단속 카메라가 없다. 티베트에서는 과속 차량 단속 구간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경찰이 종이에 출발시간을 적어 주고 일정거리마다 얼마의 시간만에 차량이 도착했는지 확인해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었다. 이런 교통규제 제도로 인해 목적지에 너무 빨리 도착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티베트인들은 단속 구간 전에 길가에 차를 대고 쉬곤 했다.

   
▲ 팅그리에서 시가체로 향하는 한적한 도로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와 판첸라마

시가체는 티베트에서 라싸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서부지역의 중심지다. 취재팀이 시가체에 도착했을 때 라싸와 같은 활기에 넘친 모습은 아니였지만 티베트 남부지역의 종교 중심지라는 명칭에 맞게 차분한 모습이었다. 시가체가 지금처럼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초대 달라이라마 '겐덴둡빠'가 서기 1447년 타쉬룬포 사원을 건립하면서부터다. 현대 티베트인들이 시가체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정신적인 지도자인 판첸라마(班禪額爾德尼)가 머물렀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판첸라마는 달라이라마와 함께 티베트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는 인물이다. 티베트인들은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보살)의 화신으로, 판첸라마는 아미타불([阿彌陀佛·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의 화신으로 믿고 있다. 티베트 전통에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 중 서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돼 법을 전해 나가는 관습이 있다. 판첸라마는 티베트불교의 2인자 자리일 뿐 아니라 달라이라마가 사망하면 그의 환생자를 지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1914년에 26.2m 높이로 세워진 금동미륵보살의 동제좌상.

그럼 판첸라마 제도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티베트 역사에는 서기 1642년 겔룩파(格魯派) 즉 황모파(黃帽派)를 정통파로 하는 정부를 수립한 달라이라마 5세가 다른 종파의 세력이 강한 서부지방에서 황모파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스승인 판첸 로산 추키겐첸(1569∼1662)이 죽은 뒤에, 그 전생자를 선정해 타쉬룬포 사원의 법왕(法王)으로 삼은데서 비롯됐다. 이후 황모파 시조 총카파의 또다른 제자인 케도프제를 판첸라마 1세로 헤아리게 된다. 제10대 판첸라마인 초이키 걀첸(1938~1989)이 사망 후인 1995년 14대 달라이라마가 당시 6세였던 '초에키 니마'가 환생자라고 밝혔지만 중국 정부는 그 결정을 무효로 하고 '초에키 니마'를 납치해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일방적으로 '기알첸 노르부'를 제11대 판첸라마라고 선포, 티베트인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우리는 오후 시간에 타쉬룬포 사원에 도착했지만 그때도 많은 티베트인들이 판첸라마의 영탑(靈塔)을 참배하고 있었다. 타쉬룬포 사원에 들어서서 티베트인들을 따라 걷자 얼마 안가 사원에서 가장 큰 건물인 대경당이 나왔다. 대경당은 판첸라마가 사원의 승려들 전체에게 불경과 설법을 강의하고 논하던 곳이다. 티베트인들은 판첸라마가 설법을 하기 위해 앉는 의자에 가까이 가 기도를 한후 판첸라마의 영탑으로 발길을 옮겼다.

   
▲ 10대 판첸라마를 모신 영탑.

현재 타쉬룬포 사원에는 제4대 판첸라마 로산 초에키 기알첸부터 제10대 판첸라마 초이키 걀첸의 영탑이 있다. 타쉬룬포 사원에도 수많은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라싸의 포탈라궁처럼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며 참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신 판첸라마의 영탑에 참배를 한다. 특히 티베트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투쟁했던 제10대 판첸라마의 영탑 앞에서는 혼란한 현대사속에서 꼿꼿하게 티베트인들을 이끌어 온 그의 넋을 기리려는듯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앙이 생활인 그들에게 타쉬룬포 사원은 티베트 불교와 잃어버린 대제국 티베트의 영광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그런 곳이었다.

※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경인일보 포토

김종화기자

jhkim@kyeongin.com

김종화기자 기사모음

경인일보

제보안내

경인일보는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제보자 신분은 경인일보 보도 준칙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며, 제공하신 개인정보는 취재를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제보 방법은 홈페이지 외에도 이메일 및 카카오톡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문의 : jebo@kyeongin.com
- 카카오톡 ID : @경인일보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안내

  • 수집항목 : 회사명,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 수집목적 : 본인확인, 접수 및 결과 회신
  • 이용기간 :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기사제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 제보가 가능합니다.
단, 추가 취재가 필요한 제보자는 연락처를 정확히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최대 용량 10MB
새로고침